소설가가 첫 문장을 쓰기 전에 이미 완벽한 소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면, 그 소설은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쓰는 과정에서 문장은 변하고, 캐릭터는 뜻밖의 행동을 하며, 결말은 예상과 달라진다.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짜 나’라는 완성본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정작 ‘나’라는 텍스트는 쓰는 과정에서만 존재한다. 어제 쓴 문장을 오늘 지우고, 내일 다시 쓴다. 이 초고들의 집합체가 바로 나다.
그렇다면 ‘가짜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쓰지도 않은 소설의 완성본을 미리 주장하는 태도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그 말이 더 이상 수정될 수 없는 최종판인 척하는 순간, 우리는 자아를 박제한다.
살아있는 정체성은 항상 ‘초고(draft)’ 상태다. 출간된 적 없고, 출간될 수도 없으며, 계속해서 수정 중인 원고.
이것은 불안정함이 아니라 자유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부정할 권리가 있고, 그 부정조차도 또 다른 초고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보자. “이게 지금까지의 초고야. 마음에 안 들면 내일 고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