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석은 이 발표를 ‘도피 일기’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어떻게 도망갈까”가 가장 큰 주제라고 말한다. 이 겸손한 표현 속에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숨어 있다. AGI가 임박한 시대에 프론티어 모델을 개발하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뿐이다: 프론티어 모델 위에서 레이어를 얹는 ‘래퍼’가 되거나, 프론티어 모델이 들어오지 못하는 ‘골목’으로 도망치는 것.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첫 번째 전략(래퍼)도 분명히 큰 기회라고 인정하면서도, 기술 창업가에게는 두 번째 전략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래퍼 전략의 핵심 성공 요인은 ‘비즈니스 감각’과 ‘GTM(Go-to-Market)‘이다. Cursor가 그 증거다. 하지만 기술 중심 창업가에게 진짜 강점은 ‘비즈니스’보다 ‘기술을 깊이 이해하고 독특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능력’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non-verifiable 데이터 영역에서 수직 통합형 AI 서비스를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틈새시장 공략’ 전략과는 다르다. 핵심은 프론티어 모델의 능력이 ‘증명된 영역’과 ‘증명되지 않은 영역’의 경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2027년이면 모든 영역에서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는 다리오 아모데이의 예측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장은 프론티어 모델이 못 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못 할 일의 구조’를 찾아야 한다. 그 구조가 바로 non-verifiability다.
도망치는 것이 비겁한가? 아니다. AGI라는 쓰나미 앞에서 모래성(래퍼)을 쌓는 것이 더 위험하다. 진짜 용기는 현실을 인정하고, 프론티어 모델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 전략은 ‘도피’가 아니라 ‘전략적 후퇴’다. 그리고 전략적 후퇴는 언제나 새로운 전선을 여는 법이다.
근거
“이 부분이—오늘 제가 얘기한 것이 이 비즈니스 부분들에 대해서 ‘어디로 도망갈까’를 고민을 많이 해 보신 분은 많이 공감이 되실 것이고, … 왜냐하면 저만 하더라도, 승준님도 사업을 시작하신다면 이게 내년에 OpenAI가 딱 끝내버릴 영역으로 가고 싶지 않으실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고민을 하다 보니 이런 데까지 도망을 왔네요. … 이것의 제일 큰 주제는 ‘어떻게 도망갈까’예요.”
연결된 생각
- 20260606-verifiability-is-the-real-moat-of-ai-business — 도망친 영역의 정체가 바로 non-verifiable data domain
- startup-strategy-against-agi — 더 넓은 맥락에서의 생존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