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법을 깨뜨린 자의 귀환
―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인간 사회의 황금률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을 말한다.
기독교의 《누가복음》 6장 31절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인간사회를 지탱해온 황금률이었다.
이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에도 이와 유사한 질서가 있었다. 낯선 이를 집에 들여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보호하며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환대의 법칙, 즉 ‘크세니아’다. 영화 《오디세이》는 이 오래된 사회적 약속을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우스의 법’이라고 부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외눈박이 괴물도, 사이렌의 노래도, 거대한 파도도 아니다. 모든 고난의 출발점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고안했다는 사실이다.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신에게 바치는 선물로 믿고 성안에 들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신들을 죽이러 온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환대와 신뢰의 법칙을 누구보다 영리하게 이해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제우스의 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그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용하여 승리했다.
이것이 영화가 오디세우스의 지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영리함은 그 자체로 선하지 않다. 규칙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은 규칙을 지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누구보다 교묘하게 악용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후자를 선택했고 트로이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승리는 동시에 인간 사이의 신뢰를 파괴한 최초의 죄가 된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항해 중 만나는 섬과 괴물, 마녀와 유혹은 단순한 모험의 장애물이 아니다. 자신이 파괴한 법칙이 사라진 세계를 직접 통과하는 형벌이다. 환대를 이용해 적을 죽인 사람은 이후 어느 땅에서도 안전한 손님이 될 수 없다. 낯선 곳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환영받을지 살해당할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왕이라는 신분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과거의 명성과 트로이에서의 승리는 새로운 섬에 도착하는 순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부하들은 그의 판단을 의심하고, 낯선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믿지 않으며, 고향에 돌아와서조차 그는 거지로 변장한 뒤 활을 당겨 자신이 진짜 오디세우스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왕조차 어제의 업적으로 오늘을 살 수 없다. 생존하려면 매 순간 능력과 자격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원작 《오디세이아》가 한 인간의 모험을 통해 삶의 유혹과 고통, 귀환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은유라면, 놀란의 영화는 그 여러 의미를 ‘제우스의 법’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집중시킨다. 원작에서는 신들의 변덕, 인간의 오만, 부하들의 탐욕과 실수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방해한다. 반면 영화는 흩어진 고난을 트로이 목마라는 하나의 원인에 묶는다. 오디세우스가 겪는 고통은 우연히 닥친 불운이라기보다, 인간사회의 근본 규칙을 무너뜨린 사람이 치르는 대가에 가깝다.
이러한 재해석은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와 직접 연결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지성을 지녔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다. 그러나 ‘만들 수 있다’는 능력이 ‘만들어도 된다’는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디세우스 역시 트로이 목마를 고안할 만큼 영리했지만, 그것을 실행할 자격까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승리를 제공하고 영웅이 되지만, 승리 이후 자신이 만들어낸 파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든 뒤 자신이 시작한 연쇄반응이 세계 전체를 집어삼킬 가능성을 두려워한다면,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이용해 환대의 법칙을 깨뜨린 뒤 아무도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세계를 떠돈다. 두 영화 모두 천재의 성취보다 천재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다크 나이트》와도 연결점이 있다. 조커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성공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지켜온 규칙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쉽게 붕괴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배트맨 역시 악을 막기 위해 도덕적 경계를 넘어설 때 자신이 지키려던 질서를 훼손할 위험에 빠진다. 놀란의 세계에서 규칙은 약자의 순진한 장식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기 위한 문명의 기반이다. 따라서 규칙을 악용해 얻은 승리는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승자 자신까지 불신과 폭력의 세계에 가둔다.
《인셉션》과의 유사성은 죄책감의 형태에서 드러난다. 코브는 아내 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감추지만, 억압된 기억은 매번 임무를 방해하는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오디세이》에서 아테나 역시 실제 여신인지,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인지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신의 실재 여부가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트로이에서 저지른 일을 자신의 내면에서 추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놀란에게 가장 집요한 괴물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합리화되지 않은 기억이다.
동시에 《오디세이》는 《인터스텔라》를 뒤집어놓은 귀환의 영화이기도 하다. 쿠퍼에게 집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주와 시간을 건너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 집은 그리움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장소다. 그는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의 귀환을 가로막는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영웅이라는 외피가 벗겨진 뒤 가족 앞에 한 인간으로 서야 한다는 공포다.
이 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과도하게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세트와 실제 로케이션, IMAX 화면이 만들어내는 물성과 규모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압도감의 상당 부분은 막대한 제작비와 뛰어난 기술진이 보장한 결과이기도 하다. 충분한 자본과 일정 수준 이상의 연출력을 지닌 감독이라면 외형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인다. 영화의 액션이나 스펙터클만 떼어놓고 보면, 놀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경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놀란의 진짜 연출력은 볼거리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2,700년 된 이야기에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부여한 데 있다. 수많은 모험담을 단순히 웅장하게 영상화한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법을 악용한 승리’와 ‘그 법이 무너진 세계에서 치르는 고난’이라는 구조로 다시 배열했다. 덕분에 사이클롭스와 키르케, 칼립소와 사이렌은 제각기 흩어진 신화적 볼거리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죄와 책임을 비추는 서로 다른 거울이 된다.
이 관점에서 영화의 핵심은 권선징악처럼 “규칙을 어겼으니 벌을 받았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규칙을 깨뜨린 사람에게 신이 별도의 형벌을 내릴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의 신뢰를 파괴한 순간, 그는 자신도 신뢰받을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버린다. 오디세우스의 고난은 외부에서 부과된 형벌인 동시에 자신이 설계한 승리의 논리적 결과다.
결국 《오디세이》는 한 왕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영리함으로 문명의 규칙을 무너뜨린 사람이 다시 인간사회로 돌아갈 자격을 얻는 과정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통해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길을 잃는다. 그의 진정한 귀환은 이타카 땅을 밟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낳은 죽음과 부하들의 희생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시작된다.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거대하게 보이게 하지만, 제우스의 법에 대한 재해석은 이 영화를 다르게 만든다. 놀란은 고대의 모험담을 현대적인 책임의 문제로 바꾼다. 사회의 규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천재가 그 규칙을 악용해 승리했을 때, 그는 과연 승리자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파괴한 질서 속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오디세이》가 원작과 갈라지는 지점이며,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원문: https://x.com/PeterLeejoa/status/2086017805036798229?s=20